들어가는 말
시간, 참 빠르다
한창 잘 나가던 10년 전에 비하면 10분의 1도 안 되지만, 요즘도 가끔 강의를 하고 나면 사인을 해 달라고 내 책이나 노트를 내미는 여성들이 꼭 있다. 성공의 비결을 짚어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행복으로의 안내도 아닌 내 말에서 무슨 영양소를 찾았나 싶어 켕기면서도 거절하지 못하고 사인을 하게 된다. 상대의 이름을 적고, '날마다 행복하세요' 같은 진부한 구절과 함께 습관적으로 날짜를 쓴다. 그런데 이럴 때 참 낭패스럽다. 날짜는 비교적 잘 기억하는데 연도가 번번이 헷갈린다. 2010년이 된 지가 언젠데 또 2009라고 쓰고 있다. 무심코 하는 거면 모르겠는데, 의식을 하는데도 그렇다.
갈수록 떨어지는 나의 집중력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는 데 있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시간은 왜 그토록 무정하게 함께 사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제멋대로 가는 걸까. 시간은 '유수'보다 빠르고 '쏘아 놓은 화살' 보다 더 빨리 달린다.
송년 모임들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신년 모임이 이어지더니 구정을 왁자하게 보내다 보면 이미 두 달이 사라져 버린 마음이다. 올봄에는 꼭 하던 일을 매듭짓겠다고 결심하기도 전에 황사니 뭐니 해서 봄이 어수선하게 지나 버리고 이내 여름이다. 해마다 찾아오는 몇십 년 만의 무더위와 씨름하며 녹초가 된 몸은 가을바람만 기다리고, 어느새 추석이다 시으면 또 겨울이다. 어렸을 때의 한 달이 요즘의 1년이다.
회갑이라고 난생처음 카지노에 가서 30달러를 잃고 배 아파하던 게 바로 지난달 같은데 난 이미 60과 70 사이의 중턱에 이르렀고, 아이고, 이 녀석이 언제 커서 제 어미 한 번 실컷 자게 하나 싶던 밤잠 짧던 큰손자는 이제 깍듯한 배꼽 인사는 물론 또박또박 제 할 말을 다 한다. 눈 깜짝할 사이 손주가 다섯이다.
그런데도 선배들은 겁을 준다. 60대만 해도 시간이 아직 느린 편이라고, 70이 넘어가면 1년이 하루처럼 흘러간단다. 그러니 60대는 달마다 늙어 가지만 70대는 날마다 늙어 간단다. 지금 생각으로도 그럴 것 같다.
얼마 전 한 80대 여성은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참 젊어 좋다"라고 덕담을 하면서 "인생 80, 한 순간이야"라고 자신의 인생을 간단하게 요약했다. 그분은 나이 일흔에 그림을 배우기 시작해서 여든에 조그만 전시회를 열어 나를 감동시켰다.
인간, 참 자기중심적이다. 10년 전, 50대 초반에 <<나이듦에 대하여>>란 좀 건방진 제목으로 책을 냈을 때만 해도 난 내가 꽤 나이가 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그 나이의 사람들을 보니, 새파랗다. 무얼 시작해도 늦지 않은 나이다. 하긴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가 어디 있으랴. 무얼 해도 10년쯤 죽자 하고 파면 최고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흉내 낼 수 있잖은가. 스스로 흡족하면 된 거지, 꼭 최고가 될 필요는 없다는 걸 나이 든 사람들은 다 안다.
지난번 책은 예기치 않게 과중한 사랑을 받았다. 어쩌면 이렇게 자기 생각과 똑같이 쓸 수 있느냐며 반기는 사람이 많았다. 물론 남들 다 드는 나이를 저 혼자 먹는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는 비아냥거림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자기 혼자 나이 드는 건 아니구나 하는 위로를 받았다는 점에선 의견이 같았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 역시 큰 위로를 받았음을 고백한다.
이번 책은 지난 10년 동안 더 나이 들어온 나의 생각 모음이다. 해마다 올해는 꼭 일기를 써야겠다고 결심하면서도 게으름 탓에 메모조차 안 하고 산 60대 여성의 10년에 걸친 일기장이다. 더 넓어진 것도 없고 더 깊어진 것도 없는, 그저 나이만 꼬박꼬박 받아먹은 내가 보인다. 나이와 더불어 부끄러움만은 점점 가벼워지니, 그거, 참 다행이다.
박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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