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언제나 나는 조금 느렸던 것 같다.
밥을 먹는 것도 느렸고, 길을 걷는 것도 느렸다. 나는 아직 반도 못 먹었는데, 이미 식사를 마친 맞은편 상대가 일어나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해하는 표정이, 내게는 참 익숙하다. 또한 누군가의 뒷모습은 내게 그의 앞모습이나 옆모습보다 익숙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보다 빨라서, 나는 뒤처져 그의 뒷모습만 보고 걷게 되니까.
감정에 있어서도 나는 참 느렸다. 나는 누군가에게든 한눈에 반해본 적이 없다. 또한 내 감정을 깨닫는 데도 한참이나 걸렸다. "너는 왜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아? 빤히 보이는 데, 나 좋아하는 거." 하지만 내가 정말 그 사람을 많이 좋아했구나, 깨달은 건 그로부터도 한 참 후였다. 좋아했구나. 과거형으로 말해야 할 만큼 한참 후.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도 나는 참 더딘 아이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받아쓰기 빵점을 받은 아이는 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을 미리 배운다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 태어날 때부터 워낙 작은 미숙아였고 병치레도 많은 아이였는지라, 엄마는 내게 한글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 후에도 워낙 작고 성장이 더딘 아이였던 나는, 키로 번호가 매겨지는 초등학교 내내 1번 아니면 2번이었고, 학교 진도도 잘 따라가지 못해 나머지 공부는 언제나 내 차지였다.
하지만 나는 또 그렇게 느린 아이였는지라,
내가 느리다는 걸 깨닫는 데도 한참이나 걸렸던 것 같다.
나는 자꾸만 숨이 찼다. 학교를 졸업하고 방송작가 생활을 하는 내내 나는 늘 숨차했던 것 같다. 움직이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마음을 정하고 바꾸는 것도, 사람들은 참 빨랐다. 그 사람들을 쫓아가느라 지쳐 나는 언제나 숨이 찼고,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면 자꾸만 어딘가로 숨고 싶어졌다.
"나 숨차, 좀 천천히 가면 안 돼? 너는 너무 빨라!"
유난히 빠른 듯한 친구와 길을 걷다 내가 멈춰 섰을 때, 친구가 나를 돌아보며 농담처럼 던진 말.
"네가 느리다고는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니? 너 빼곤 다 빠르잖아?"
그때 나는 처음으로 깨닫게 됐던 것 같다. 멈춰 서 있는 내 주위를 빠르게 지나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서른도 훌쩍 넘은 그제야, 겨우, 처음으로.
아, 그럼 내가 느린 걸 수도 있겠구나.
어쩌면 그래서 나는 늘 숨이 찼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나와 다른 속도, 그래서 전혀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과 나란히 걷고 싶어, 무리하게 속도를 내다 그렇게, 내내 숨이 차고 어지러웠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참 느리다. 읽으면서 계속 그런 느낌이 드네. 한참 바라보고 관찰하다가. 또 한참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아, 그랬구나...' 참 느리고 더딘 것이, 더 너 같기도 하고."
몇 년 동안 조금씩 써둔 글이 어느새 꽤 모였을 때, 한 선배가 했던 말, 그제야 나는 또, 새삼 깨닫게 됐던 것 같다.
아, 나는 정말 느리구나.
그러니 내가 쓴 글이라는 것도 느릴 수밖에 없겠구나.
하지만 나는, 그래서 더 반가웠던 것 같다.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났을 때. 그런 사람이 쓰고 그린 것 같은 책이나 영화를 만났을 때.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세상에 나만큼이나 혹은 나보다 더 느린 사람들도 참 많구나. 반갑고, 그것이 위안이 되는 순간도 참 많았다. 느리지만, 그 느린 안에서 누구보다 성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나의 느림이 나 또한 싫지만은 않게 느껴질 수 있었으니까.
나의 이야기도 누군가에게,
그런 반가움을 안겨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가 정말 느린 사람이든, 아니면 한순간 불현듯 내가 참 더디고 느리다는 생각이 들어 쓸쓸해진 누군가이든, 나는 느리지만 사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나는 느리지만
나는 사실 '다만, 조금 느릴 뿐'이라는.
반가움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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