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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소개

안철수의 생각 (안철수) - 여는 글 제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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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생각 (안철수) - 여는 글 제정임

여는 글 - 제정임


안철수의 마음에 귀 기울이다


지난 4월 중순의 어느 저녁 무렵이었다.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더니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었다. 그는 <벼랑에 선 사람들>을 잘 읽었다면 식사를 한번 같이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벼랑에 선 사람들>은 내가 주간교수로 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의 온라인신문 <단비뉴스>가 1년 반 동안 우리 사회의 빈곤 현장을 심층취재한 것을 묶어낸 책으로, 4월 초에 막 출판되었다. 안 원장은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이 책을 선물 받았는데 기사로 다룬 얘기들을 좀 더 상세히 듣고 싶다고 했다.

그다음 주, 서울 마포의 한 식당에서 안 원장, 나, 그리고 우리가 공통적으로 아는 사람들 몇 명이 저녁을 함께했다. 우리는 우선 책을 화제로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 원장은 "대학원생들이 직접 야간청소부 등으로 취업해 비정규 노동의 고충을 체험한 기사들이 특히 인상적이었고 글의 수준이 기성 언론에 못지않아 놀랐다"라고 말했다. 또 보육과 의료, 주거와 부채 문제 등 가난한 사람들의 불안과 설움을 생생하게 고발하면서 대안까지 꼼꼼히 제시하고 있어 민생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

안 원장은 책을 읽는 동안 대학 시절 가톨릭학생회에서 의료봉사를 다니면서 만났던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의대 본과 2학년부터 4학년까지 3년 동안 서울 고로동과 두메산골 무의촌 등에서 진료 봉사활동을 했는데, 너무 가난하니깐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륜마저 무참히 버려지는 경우가 있더라고 회고했다. 구로동의 한 성당에서 주말마다 진료를 할 때 만난 어느 초등학생 여자 아이는 아버지는 병으로 죽고 어머니는 집을 나가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 아이는 신문 배달을 하며 아픈 할머니를 돌봤는데, 중학생이 된 후 병든 할머니를 돌보기가 힘에 부치자 아이는 가출했고 할머니는 굶어 숨진 채로 발견됐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력한 사람들은 사회가 돌봐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을 보고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제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많이 고민했죠."

우리나라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얘기할 때도 안 원장은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산전 후 휴가와 육아휴직 등 제도는 갖춰져 있지만 회사의 눈치와 압력 때문에 실제로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내용이 책에 있는데. 안 원장의 부인인 김미경 서울의대 교수도 레지던트 시절 설움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레지던트 1년 차 때 아이를 낳았는데 숨 돌릴 틈 없이 돌아가는 병원 사정 때문에 당시 60일이던 법정 출산휴가를 절반밖에 못 썼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가 여러 해 이어지다 보니 둘째 아이를 가질 생각은 아예 접고 말았다. 임신한 레지던트에 대한 배려도 거의 없어, 병리를 전공한 김 교수는 '아침까지 시체 해부를 하다가 저녁에 애 낳으러 간' 상황이었다고 한다. 안 원장은 또 얼마 안 되는 전공의 월급으로 아이를 키우면서 사람을 쓸 형편도 되지 않았고 믿고 맡길 만한 보육시설을 찾기도 어려웠다고 했다. 그래서 1년 중 3분의 2는 아이를 외할머니 집으로 출퇴근시키며 신세를 지고, 나머지는 부산 친가에 맡겨놓는 등 '육아 이산가족'도 경험했다. 안 원장이 20여 년 전 겪은 척박한 보육환경이 오늘날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현실이다.

"서민들은 물론 중산층까지도 이런 형편인데, 낙후된 복지를 조금 확충하자는 정도의 얘기를 갖고도 '포퓰리즘'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화가 납니다."

얘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나는 기자 출신의 '직업병'을 감추지 못하고 모두가 궁금해하는 그의 '대선 출마 여부'를 물었다. 그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라고 답했다. 자신이 유력한 대선후보로 꼽힐 만큼 높은 지지도가 나오는 데 대해서는 변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자신에 대한 기대로 나타나는 것 같아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반면 자신에 대한 기대가 온전한 지지인지, 일부의 지적처럼 환상이나 거품이 낀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자신이 지금까지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만드는 것'과 '흔적을 남기는 삶'을 추구했지만 과연 정치 현장에서도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인지 스스로에 대한 엄정한 평가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 원장은 서울시장 재보선을 앞둔 지난해 9월 '출마 고민'이 보도된 이후 잠재적 대선주자로 신문방송에 오르내리게 되면서 겪었던 마음고생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20여 년간 언론에 노출된 상황에서도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던 편인데, 어느 순간 수많은 '안티'가 생기더군요."

자신이 잘못한 것을 지적한 비판이라면 겸허하게 받아들이겠지만, 있지도 않은 일을 지어내서 비난하거나 발언의 맥락을 왜곡해서 공격할 때는 참 답답했다고 한다. 특히 일부 정치인들이 터무니없는 얘기를 만들어 퍼뜨린 것이 지금도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데, 일일이 대응을 했다가는 오히려 그런 얘기들에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 될 것 같아 그냥 무시했다고 말했다. 가까운 가족, 친척, 친구들은 모두 '그 험한 정치판에 왜 들어가려고 하느냐', '지금까지처럼 명예를 지키고 존경받으며 사는 길을 가라'라고 아우성이란다. 그러나 안 원장은 "지금까지 부끄러움 없이 살려고 최선을 다했으니 이런 공격이 무서워서 해야 할 일을 피하진 않을 것"이라며 "중요한 것은 과연 내가 감당할 능력이 있느냐, 많은 국민들의 지지가 진정한 것이냐에 대한 판단"이라고 강조했다.

그로부터 2주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안 원장이 다시 연락을 했다. 그는 "인터뷰 형식으로 함께 책을 낼 수 있겠느냐"라고 제안했다. 당초 정치 참여와 상관없이 청년들의 '멘토'로서 조언하고 싶은 얘기들을 중심으로 책을 쓰고 있었는데, 지금처럼 자신에게 정치적 시선이 쏠리고 있는 상황에서 대중의 주된 관심사와 거리가 있는 책을 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고민 중이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질문하고 자신이 답하는 형식으로 국민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면 어떻겠냐는 얘기였다. 자신을 지지하는, 혹은 지지하지 않는 국민들에게 스스로의 생각과 입장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판단을 구하고 싶다는 뜻인 것 같았다.

학기말까지 처리해야 할 산적한 업무가 머리를 스치면서 '시간이 없는데---' 하는 생각이 앞섰지만, 기자 출신으로서 온 국민이 궁금해하는 '안철수의 생각'을 가장 먼저 들어보고 전달한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독자들이 궁그해할 만한 사안에 대해 내가 주도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안 원장은 모든 질문에 성실하게 답한다는 것을 전제로 인터뷰를 맡기로 했다. 그리고 인터뷰에 앞서 내 입장을 간략히 설명했다. 대학원에서 예비언론인들을 가르치고 신문방송을 통해 논평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사회 현안에 대해서는 분명한 의견을 밝히되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과는 거리를 둔다는 개인적 소신을 지키고 싶다. 그러니 이 인터뷰는 최대한 언론인의 입장에서 할 것이고, 안 원장이 나중에 정치 참여를 선언하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 나는 비판적 관찰자가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안 원장은 나의 이런 입장을 이해했다. 그리고 이 대담집이 자신의 정치 참여 여부를 떠나 우리가 만들어나가고 싶은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생각을 제시하고 토론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5월 중순부터 6월 하순까지 약 한 달 반 동안 나는 서울대학교의 안 원장 연구실 등에서 아홉 차례에 걸쳐 2~3시간씩 그를 인터뷰했다. 나는 주로 아메리카노 커피를, 안 원장은 생수와 비타민 음료 등을 마시며 편안하게 대화했다. 인터뷰 질문은 미리 제시하지 않았고, '다음 시간엔 일자리와 노동권 문제에 대해 얘기하자'는 식으로 주제만 예고했다. 인터뷰는 안 원장이 정치 참여를 고민하게 된 배경과 인생 역정, 가족 등 '인간 안철수'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 그가 지향하는 우리 사회의 미래 구상을 들어보고, 현재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사회 현안들에 대한 의견을 묻는 순서로 진행됐다. 그리고 '청년들의 멘토'로서 활동해 온 그의 경험을 살려 미래의 주역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로 마무리했다. 때때로 주제를 벗어나 대화가 샛길로 빠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약속한 시간 외에 더 여유를 내기 어려운 서로의 일정 때문에 서둘러 본론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동안 언론 보도나 대표적인 저서를 통해 그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인터뷰를 하면서 그에 대한 선입견의 많은 부분이 깨졌다.

우선은 그가 의학과 정보기술 배경을 가진 기업인 출신이니 경제와 과학기술 등에는 전문성이 있겠지만, 그 외의 정치사회적 현안에 대해서는 깊이 알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인터뷰를 하면서 어떤 질문은 ㅇ던져도 그는 막힘없이, 나의 기대를 넘어서는 이해도를 보여주었고 주요 정치사회적 쟁점에 대해 나름의 판단과 대안을 내놓았다. 특히 복지, 정의, 평화 등 안 원장 자신이 제시한 키워드와 관련된 사회불안의 해소, 경제 민주화와 동반성장, 남북관계의 개선 등에서는 꽤 깊은 성찰이 있었음을 드러냈다. 상당한 기간 동안 우리 사회의 주요 현안들에 대해 치열하게 연구하고 고민해 온 것 같았다. 또 의사, 프로그래머, 경영자, 교수뿐 아니라 시민단체인 아름다운 재단 이사, 정부의 각종 위원회와 포럼 활동 등을 통해 쌓아 온 폭넓은 경험에다 청춘콘서트 등 강연과 저술을 통해 대중과 소통해 온 과정이 그의 사고에 밑거름이 되어준 듯했다.

둘째, 그는 '타고난 천재'이며 처음부터 잘 나간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대기만성'형 인물이었다. 그가 남다른 재능을 타고났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의사 일을 하면서도 무려 7년간 정보기술 프로그래머로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했고, 경영자가 된 후에는 시가 총액 수천억 원대의 기업을 키웠으며, 중년의 나이에 새로운 전공으로 다시 공부를 시작해 교수가 되는 등 '마음먹은 대로 척척 살아온 듯한' 이력 때문이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그는 어떤 일이든 처음엔 부진하거나 실수가 많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대는 남들보다 한 해 먼저 입학하는 바람에 몸집이 작고 적응도 늦어 학교 공부를 잘 따라가지 못했다. 성적표에서 '수'나 '우'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갈수록 나아지긴 했지만 중학교 때까지도 성적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고등학교 3학년 무렵이 되어서야 서울의대에 갈 수 있는 실력이 됐다고 한다. 회사를 차린 후에도 수많은 실수를 하면서 시행착오를 통해 배웠다고 털어놓았다. 다만 같은 실수를 절대 반복하지 않는다는 철칙은 지켰단다. 교수가 된 후에도 처음엔 강의가 서툴렀다고 했다. 그러나 메모를 해가면서 부족한 부분을 연구하고 고쳐나간 결과 카이스트 학생들의 강의평가에서 최고 수준의 평점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100미터 달리기 기록은 15초다. 남자로서 빠른 편이 아니다. 단거리경주에서는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단다. 하지만 오래 참고 달려야 하는 장거리에서는 곧잘 1등을 했다고 한다. 온화한 인상 이면세 만만치 않은 근성과 맷집을 가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 번째 선입견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없는 설움'을 모르고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 부부가 월급 30~40만 원가량의 국립대 조교와 전공의로 일하며 빠듯하게 생활하느라 양가 부모님 눈치를 보며 아이를 맡겨 키워야 했고, 결혼 후에 긴 전세살이를 하며 '집 없는 설움'도 겪었다. 회사를 차린 후에는 몇 년간 직원들의 월급을 주기 위해 '어음깡'을 하러 다녀야 했다. 그는 월급날이 다가올 때마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담당자의 눈치 때문에 은행 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던 중소기업 사장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력서에 드러난 화려함과 다릴 그는 '돈 없고 힘없는 이들의 설움'에 대해 공감의 폭이 넓어 보였다. 그가 복지와 정의를 앞세워 우리 사회의 미래상을 그린 것은 '차가운 머리'보다 '뜨거운 가슴'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뜻 우리 사회의 양지만 밟고 살았을 것처럼 보이는 그가 경제 민주화, 권력기관 개혁 등 다양한 쟁점에서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사회 밑바닥의 아우성을 체험으로 들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마지막 선입견은 안 원장이 고부와 일밖에 모르는 건조한 사람일 것이란 생각이었다. 예전에 한 TV프로그램에서 "이효리가 누군지 모른다"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에 남은 탓이었다. 알고 보니 아니었다. 그는 TV의 가요나 예는 프로그램은 잘 안 보지만 휴일 아침 아내, 딸고 ㅏ함께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조조할인을 찾아가는 영화광이다. 또 "롯데가 계속 질 때는 가슴이 아파 경기를 못 보겠더라"라고 말하는 야구 마니아였다. 최근 미국에서 수학과 화학 두 분야의 석사학위를 받은 딸 얘기를 할 때는 자랑스러움이 얼굴 가득 피어오르는 '보통 아빠'였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다가 경비아저씨에게 '똑바로 하라'라고 핀잔을 듣고, "부부싸움을 하면 늘 내가 야단맞고 반성하는 것으로 끝난다"라고 털어놓는 '이웃집 남편'이었다. "진료실 책상에서 죽음을 맞고 싶다"라고 했던 부친이 언론의 등쌀에 서둘러 병원 간판을 내리게 됐을 땐 마음고생으로 밤잠을 설친 정 많은 아들이기도 했다.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결심이 되셨느냐"라고 묻자 안 원장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이렇게 되물었다. 역대 대통령 중 단 한 사람도 비극적 결말을 피하지 못한 나라에서, 모략과 음해가 난무하는 정치판에 나서 싸우기엔 그의 권련의지가 약해 보이고, 그가 잘할 수 있는 다른 가치 있는 일이 더 많아 보인다. 반면 우리 사회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싶다는 그의 개혁의지는 예사롭지 않아 보이고, 여야의 어떤 후보에게서도 희망을 찾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는 상당수 유권자들의 기대에도 이유가 있어 보인다. 자신에게 과연 잘할 능력이 있는지, 국민들의 지지가 온전한 것인지를 거듭 따져보는 그의 신중함을 비난할 수 없다.

"고독한 결단만이 남았에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인터뷰가 마무리된 이 순간까지도 나는 그가 대선에 출마할지, 하지 않을지 솔직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여기 그려낸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은 그의 정치행보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귀 기울일 만한 제안서다. '세상의 긍정적인 변화'를 추구하며 온 힘을 다해 달려온 그가 자신의 경험과 지식, 고민을 한 땀 한 땀 수놓아 펼친 미래 지도다. 이 지도를 들고 무엇을 할 것인지,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그와 이야기를 해볼 시간이다.



2012년 7월
제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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